전체 글(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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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에 솔직한 사람에게는 늘 속수무책이다.
2016년 여름, 세비야에서 말라가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던 중이었다. 기온은 섭씨 42도를 웃돌아 눈앞은 쨍하고 거리 곳곳에서 분사한 물이 오렌지 나무 위로 안개처럼 흩어지고 있었다. 햇살이 살을 찌를 듯 뜨거워도 그늘에 들어서면 금세 시원해지는 게 너무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그때였다. 갑자기 한 사람이 바닥에 주저앉더니 울기 시작했다. 정류장에 있던 사람들과 지나가던 사람들은 당황해서 웅성거렸다. 그야말로 엉엉 소리 내 우는 울음이었기 때문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 여성분이 그 사람에게 다가가 대화를 나누는 듯하더니 잘 달래서 택시를 태워 보냈다. 여기까지가 그날 눈앞에 일어난 일의 전부다. 그런데 그 일이 왜 그렇게 나를 흔들어 놓았을까. 시간이 이렇게나 흐른 지금까지도. 이마에 둘리어 있던 인디언..
2024.11.12 -
월악산 제비봉 산행 (2024.08.18.)
제비봉을 오르며 내려다 본 아름다운 충주호 풍경 먼저 감상하세요. 아름답죠 아름답잖아 그러니까 다들 제비봉 가세요. 나만 당할 수는 없어어앙아ㅏㅏㅏ악ㅋㅋ 폭염주의보가 내려졌던 8월, 겁도 없이 월악산을 올랐다. 주차는 지도 속 표시된 공원지킴터 맞은편 공터에. 경남에서 충북은 꽤 먼 곳이라 아침에 서둘러 나왔어도 도착하니 이미 한낮이어서 11시부터 산행을 시작했다. 제비봉 정상을 찍고 원점회귀하는 코스로 총 거리는 편도 2.3km, 소요 시간은 6시간(11시-17시)이 걸렸다. 체감상 난이도 중상. 체력이 쓰레기인 사람이 중간중간 휴식을 충분히 취하고, 점심도 먹은 시간 포함이며 정상 체력인 분들은 2~3시간만에도 다녀오신다고 한다. 말도 안돼... 늘 느끼는 거지만 세상엔 뭘 몰라야 할 수 있는 ..
2024.11.11 -
헤어졌다.
조승연 작가나 이동진 평론가, 다니엘 린데만과 같은 사람들 무리에 별안간 끼어있고 싶다. 그냥 취향이 그렇다. 염화미소처럼 서로 알아채 마음 깊이 공감하는 대화를 주고받고 싶다. 그들의 흘러넘치는 교양을 곁에서 조금이라도 나눠 갖고 싶다. 배우는 데 열심인 사람은 알게 된 것을 말하고 싶어 한다는 특징이 있으니까, 곁에서 짐짓 모르는 체하고 있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무심하게 들어줘야지. 한날은 책이나 영화에 대해 다양한 각도의 감상을 두루 나누고도 싶다. 그들의 대화 속에 녹아들기 위해 막 허덕허덕여도 너무너무 행복하겠지. 내게 강같은 지적 허영, 달콤한 꿈. 얼마 전 헤어진 사람은 거짓말을 일삼는 사람이었다. 미혼이라고 거짓말하더니 다음엔 이혼했다고 했고, 그 다음엔 아직 이혼 서류도 제출하지 않은 상..
2024.11.10 -
오늘책 / 우리가 겨울을 지나온 방식 / 문미순
살다 보면 힘들 때마다 기가 막히게 나타나 등을 밀어주는 것들이 있다. 주로 뜻밖이며 작은 것들이다. 구하고자 한다면 추운 공기 속 은은한 햇볕이나 따듯한 손, 사람들의 부서지는 웃음소리에도 응원을 받을 수도 있다. 책에서는 이웃이지만 신뢰를 쌓아갈만한 시간이 충분하지 않은 두 인물이 나온다. 여기서 그만 포기해도 누구 하나 뭐라할 수 없는 나날들이 펼쳐지는 주인공들이다. 이들이 서로를 믿기로 작정한 뒤 앞으로 나아갈 일만 걱정해도 되었을 때 다들 숨통이 트이지 않았을까? 책을 다 읽은 후 이슬아 작가의 다정한 연대에 관한 글이 떠올라 찾아봤다. 내가 가는 길을 앞서갔거나 같은 처지에 놓인, 혹은 누군가 의견을 구했을 때 해 줄 말이 있는 사람들이 서로 연대했으면 한다. 작은 다정들이 모이면 무언가..
2024.11.09 -
영남알프스 천황산, 재약산 산행 (2024.10.24.)
드디어 천황산, 재약산 등반에 성공했다. 올 2월에 뜻밖의 케이블카 안전점검 이슈로 입구에서 허망하게 돌아왔던 적이 있다. 벼르고 벼르다 8개월만에 성공해서 굉장히 뿌듯했던 산행.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 붉은색으로 등산하고 푸른색을 따라 하산하는 코스로, 중간 지점 천황재에서 오른쪽으로 난 길(샘물상회 방면)을 따라 원점회귀하게 된다. 소요 시간은 총 5시간(12시-17시)이 걸렸다. 휴식 시간과 길을 잃은 시간 포함된 시간이고, 일부러 느릿느릿 걸었기 때문에 보통 체력의 소유자라면 산행 시간은 1시간 정도 단축할 수 있다.막상 도착해보니 줄줄이 차들이 노상주차를 하느라 호박소 방면으로 끝도 없이 이어져있었다. 아니 평일인데 등산객들이 이렇게나 몰린다고? 근데 그럴 수밖에,,, 주차장이 너무 좁다. 그래..
2024.11.08 -
이게 다 호르몬 때문이다.
생리 전후로 늘 컨디션 난조가 따른다. 무거워지는 몸보다 가라앉는 기분이 큰일이다. 우연히 생리 주기 애플리케이션을 알게 돼 생리 시작일과 종료일, 그날의 컨디션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의견 충돌이 유독 잦거나 우울해져 울음이 터지는 날들이 차곡차곡 쌓이면서 재미있는 맞물림을 발견했다. 생리가 얼마 남지 않은 때마다 좌절하고 갑작스러운 화를 주체 못하거나 상처를 주고받는 내가 보였다. PMS가 있다는 걸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데이터를 보고 있자니 충격이 크면서도 오히려 마음이 놓였다. 생리가 시작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우울과 슬픔은 사라지니까. 다스리면 된다.몸과 정신의 대격돌 시기를 자각한 뒤로 최대한 안전한 환경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사람들과의 만남을 줄이고, 즐겁고 재미있는..
2024.05.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