랭보의 낭보(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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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이 타들어가니 눈물이 난다.
발길 닿았던 산이, 눈에 담았던 산이, 그도 아니면 언젠가 하고 마음에 두었던 산들이 타들어간다. 숭례문이 타들어갈 때도 이렇게 아프진 않았다. 이 정도로 애가 닳진 않았는데. 산청 산불 진화 과정에서 돌아가신 분들의 소식과 집이 타들어가는 걸 멀리서 바라보는 마을 주민들의 눈시울에 시선이 머물더니 나도 기어이 눈물이 났다. 어릴 때부터 다녔던 지리산이라 그런가. 땅 위를 힘차게 내지르던 혈맥이 새카맣게 재만 남아 도드라진 모습이 괴롭다. 언젠가 산불이 나는 걸 직접 본 적이 있는 아버지는 그 때의 두려움을 두고두고 이야기한다. 커다란 덤불같은 불씨가 바람을 타고 산 하나를 훌쩍 넘어가면 도저히 막을 수가 없다고. 불씨 움직이는 모양새가 꼭 두 발 달린 생물같다고. 눈사람을 만드는 사람이 있고 그걸 꼭 ..
2025.03.26 -
하루를 산다.
Happy new year Happy new you속 시끄러운 연말이지만 집안 청소를 모두 마치고 한해를 천천히 되짚어 본다.쉬어가기를 잘했다 싶은 일들이 많았다. 평일 거리와 도로의 분주함이 참 의아했고 신선했었다. 뚝딱거리며 음식을 만들고, 늘어지게 자고 일어나 씻지도 않고 게으름을 잔뜩 피웠다. 가고 싶던 곳을 가고, 보고 싶은 것을 보고, 하고 싶던 것을 하며 메모장의 적어 둔 목록들을 하나씩 지워나갔다.내가 나일 수 있는 순간과 시간을 함께했던 사람들이 있다. 충만함으로 넘실거리던 그 계절을 나는 영원히 잊지 못하겠지.요즘들어 닥치는대로 읽고 보고 쓴다. 이유를 알지만 해법은 모른다. 욕심을 버리고 기대를 내려놓고 다만 할 일을 한다. 하루를 산다.새해에도 가능한 한 많은 노을과 숲을 찾아야겠다..
2024.12.31 -
우린 조금씩 다르다.
며칠 전 겨울 산행에 필요한 등산 바지를 보러 매장에 들렀다. 생활 방수가 되는 고어텍스 소재에 마음에 드는 디자인이면 좋겠다, 생각하면서. 두 번째 매장에서 원하는 기능에 합리적인 가격의 바지를 찾았다. 입어보니 디자인도 튀지 않아서 여기저기 갖춰 입기 좋을 것 같았다. 드레스룸에서 갈아입는데 바깥에서 사장님이 친구와 대화를 나누는 소리가 들렸다. 회사에서 가시는 거예요? 아뇨, 혼자서 에이 혼자가면 재미가 있나,같이 가야 이야기도 하고 좋지. 정작 나는 대화에 끼지 못한 채 두 사람이 하는 내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기분이 안 좋아졌다. 결국 사려던 마음을 접고 둘러보고 오겠습니다, 하고 나왔다.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다. 혼자서 무엇을 한다고 하면 약속이나 한 듯 따라붙는 말들이다. 참 신기한..
2024.12.30 -
작은 다정이 모이면 세상을 구할 수 있다.
사람이 다정해지려고 마음먹는 건어떤 순간일까? 오늘도 다정한 사람을 만났다.오랜만에 교보문고에 들러 먼저 손을 씻으려 화장실로 향했다. 비누 디스펜서가 말을 듣지 않길래 손을 씻고 이제 막 나가려던 분께 물었다. 그분은 내 손목을 잡고 이 부분에 손을 대고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아 위치의 문제였구나. 알려주신 대로 손을 갖다 대니 과연 부드럽게 거품이 나온다. 그분은 가려던 걸음을 멈추고 거품이 나올 까지 지켜보고 가셨는데, 내가 감사하다고 인사도 했는데. 아니 그러니까, 이게 이렇게까지 친절한 일인가 싶은 거다. 웰링턴 항구에서 공항 셔틀버스 타는 곳까지 일부러 함께 가주신 할머니도 그렇다. 나는 처음에 돈을 요구하는 거지인 줄 알고 '나는 당신에게 줄 돈이 없다'고 여러 번 이야기했고, 할머니는 그..
2024.11.18 -
감정에 솔직한 사람에게는 늘 속수무책이다.
2016년 여름, 세비야에서 말라가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던 중이었다. 기온은 섭씨 42도를 웃돌아 눈앞은 쨍하고 거리 곳곳에서 분사한 물이 오렌지 나무 위로 안개처럼 흩어지고 있었다. 햇살이 살을 찌를 듯 뜨거워도 그늘에 들어서면 금세 시원해지는 게 너무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그때였다. 갑자기 한 사람이 바닥에 주저앉더니 울기 시작했다. 정류장에 있던 사람들과 지나가던 사람들은 당황해서 웅성거렸다. 그야말로 엉엉 소리 내 우는 울음이었기 때문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 여성분이 그 사람에게 다가가 대화를 나누는 듯하더니 잘 달래서 택시를 태워 보냈다. 여기까지가 그날 눈앞에 일어난 일의 전부다. 그런데 그 일이 왜 그렇게 나를 흔들어 놓았을까. 시간이 이렇게나 흐른 지금까지도. 이마에 둘리어 있던 인디언..
2024.11.12 -
헤어졌다.
조승연 작가나 이동진 평론가, 다니엘 린데만과 같은 사람들 무리에 별안간 끼어있고 싶다. 그냥 취향이 그렇다. 염화미소처럼 서로 알아채 마음 깊이 공감하는 대화를 주고받고 싶다. 그들의 흘러넘치는 교양을 곁에서 조금이라도 나눠 갖고 싶다. 배우는 데 열심인 사람은 알게 된 것을 말하고 싶어 한다는 특징이 있으니까, 곁에서 짐짓 모르는 체하고 있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무심하게 들어줘야지. 한날은 책이나 영화에 대해 다양한 각도의 감상을 두루 나누고도 싶다. 그들의 대화 속에 녹아들기 위해 막 허덕허덕여도 너무너무 행복하겠지. 내게 강같은 지적 허영, 달콤한 꿈. 얼마 전 헤어진 사람은 거짓말을 일삼는 사람이었다. 미혼이라고 거짓말하더니 다음엔 이혼했다고 했고, 그 다음엔 아직 이혼 서류도 제출하지 않은 상..
2024.11.10 -
이게 다 호르몬 때문이다.
생리 전후로 늘 컨디션 난조가 따른다. 무거워지는 몸보다 가라앉는 기분이 큰일이다. 우연히 생리 주기 애플리케이션을 알게 돼 생리 시작일과 종료일, 그날의 컨디션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의견 충돌이 유독 잦거나 우울해져 울음이 터지는 날들이 차곡차곡 쌓이면서 재미있는 맞물림을 발견했다. 생리가 얼마 남지 않은 때마다 좌절하고 갑작스러운 화를 주체 못하거나 상처를 주고받는 내가 보였다. PMS가 있다는 걸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데이터를 보고 있자니 충격이 크면서도 오히려 마음이 놓였다. 생리가 시작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우울과 슬픔은 사라지니까. 다스리면 된다.몸과 정신의 대격돌 시기를 자각한 뒤로 최대한 안전한 환경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사람들과의 만남을 줄이고, 즐겁고 재미있는..
2024.05.07 -
스노클링을 했다.
다음날 일정은 스노클링이어서 월마트에 들렀다. 수영을 배운 적 없지만 왠지 스노클링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장을 다 보고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근처 해변을 걸었다. 근데 가만, 영수증에 찍힌 스노클링 세트의 수량이 2개다. 다시 월마트로 갔다. 영수증을 보여주며 사정을 설명하자 매니저는 시시티브이를 돌렸다. 깜박이는 화면 속에 계산대 앞 내 모습이 내려다보였다. 확인을 마친 매니저는 차액을 돌려줬다. 그 돈으로 다시 아이스크림을 샀다. 하나우마 베이에 입장해서 삼십 분 정도의 교육을 받으니 손등에 바다거북 도장이 찍혔다. 귀여운 입장권. 그늘진 곳에 비치타월을 대충 깔아두고 바다로 들어갔다. 요령을 몰라 수경에는 금방 습기가 찼고, 여러 번 물 위로 올라와 재정비를해야 했다. 그런데도 손가락으로 책장을..
2024.05.04 -
집순이에게 알라딘 중고서점은 최고다.
올해 목표는 이사. 매물은 몇 년 전부터 알아보는 중이다. 입지가 좋은 곳이라 하락장에도 가격은 2021년 수준. 오를 땐 확 오르더니 떨어질 땐 더디구나. 생각난 김에 오늘은 짐도 정리할 겸 책장을 엎었다. 어쩐지 책은 눈 같아서 조용히 차곡차곡 쌓여간다. 주기적으로 정리하는 것이 좋다. 책을 버릴 때는 알라딘 어플을 이용한다. 직접 중고서점에 가져다 팔아도 되지만 편한 게 최고다. (예전엔 그냥 폐지처럼 집 앞에 갖다 버렸다.) 노랗게 표시한 저 탭만 누르면 그 이후론 알아서 착착. 얼마나 간편하냐면, 1. 카메라로 책의 바코드를 찍는다. 2. 매입가능 여부를 판단해 준다. 3. 출판 시기나 가치에 따라 가격을 측정해 준다. 4. 박스에 넣어 문 앞에 두면 택배사에서 가지러 온다. 5. 상품 상태를 ..
2024.02.18 -
휴직을 신청했다.
_ 15년 동안 달려왔더니 어딘가 고장 났나 보다.하루는 출근하려는데 숨이 가쁘고 식은땀이 났다. 소리치던 사람과 옆에서 거들던 사람과 가만히 살피던 사람들이 있다. 일하기 시작한 뒤로 전화가 오면 심장이 툭 떨어진다.몰아세우는 듯한 전화는 몇 번이고 울린 후 꺼진다. "요즘 몸이 많이 안 좋으셔, 그러니까 웬만하면 잘해." 그렇게 말하는 사람을 텅 빈 눈으로 바라봤다.나야말로 병원에 다니고 있다고, 아픈 건 나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_ 하늘을 우러러 부끄럼 없이 살아왔지만, 어느 날 더러워졌다.부패한 집단에 속한 뒤로 단 하루도 떳떳하지 못했다. "기부입학도 있잖아. 그런 거 흠도 아니야." 그런가.그런가 보다 하고 살아왔다. 그렇게 어울리지 못하고, 동화되지 못하고, 겉돌며 15년을 지냈다.어떻게 ..
2024.0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