랭보의 낭보(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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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를 산다.
Happy new year Happy new you속 시끄러운 연말이지만 집안 청소를 모두 마치고 한해를 천천히 되짚어 본다.쉬어가기를 잘했다 싶은 일들이 많았다. 평일 거리와 도로의 분주함이 참 의아했고 신선했었다. 뚝딱거리며 음식을 만들고, 늘어지게 자고 일어나 씻지도 않고 게으름을 잔뜩 피웠다. 가고 싶던 곳을 가고, 보고 싶은 것을 보고, 하고 싶던 것을 하며 메모장의 적어 둔 목록들을 하나씩 지워나갔다.내가 나일 수 있는 순간과 시간을 함께했던 사람들이 있다. 충만함으로 넘실거리던 그 계절을 나는 영원히 잊지 못하겠지.요즘들어 닥치는대로 읽고 보고 쓴다. 이유를 알지만 해법은 모른다. 욕심을 버리고 기대를 내려놓고 다만 할 일을 한다. 하루를 산다.새해에도 가능한 한 많은 노을과 숲을 찾아야겠다..
2024.12.31 -
우린 조금씩 다르다.
며칠 전 겨울 산행에 필요한 등산 바지를 보러 매장에 들렀다. 생활 방수가 되는 고어텍스 소재에 마음에 드는 디자인이면 좋겠다, 생각하면서. 두 번째 매장에서 원하는 기능에 합리적인 가격의 바지를 찾았다. 입어보니 디자인도 튀지 않아서 여기저기 갖춰 입기 좋을 것 같았다. 드레스룸에서 갈아입는데 바깥에서 사장님이 친구와 대화를 나누는 소리가 들렸다. 회사에서 가시는 거예요? 아뇨, 혼자서 에이 혼자가면 재미가 있나,같이 가야 이야기도 하고 좋지. 정작 나는 대화에 끼지 못한 채 두 사람이 하는 내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기분이 안 좋아졌다. 결국 사려던 마음을 접고 둘러보고 오겠습니다, 하고 나왔다.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다. 혼자서 무엇을 한다고 하면 약속이나 한 듯 따라붙는 말들이다. 참 신기한..
2024.12.30 -
작은 다정이 모이면 세상을 구할 수 있다.
사람이 다정해지려고 마음먹는 건어떤 순간일까? 오늘도 다정한 사람을 만났다.오랜만에 교보문고에 들러 먼저 손을 씻으려 화장실로 향했다. 비누 디스펜서가 말을 듣지 않길래 손을 씻고 이제 막 나가려던 분께 물었다. 그분은 내 손목을 잡고 이 부분에 손을 대고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아 위치의 문제였구나. 알려주신 대로 손을 갖다 대니 과연 부드럽게 거품이 나온다. 그분은 가려던 걸음을 멈추고 거품이 나올 까지 지켜보고 가셨는데, 내가 감사하다고 인사도 했는데. 아니 그러니까, 이게 이렇게까지 친절한 일인가 싶은 거다. 웰링턴 항구에서 공항 셔틀버스 타는 곳까지 일부러 함께 가주신 할머니도 그렇다. 나는 처음에 돈을 요구하는 거지인 줄 알고 '나는 당신에게 줄 돈이 없다'고 여러 번 이야기했고, 할머니는 그..
2024.11.18 -
감정에 솔직한 사람에게는 늘 속수무책이다.
2016년 여름, 세비야에서 말라가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던 중이었다. 기온은 섭씨 42도를 웃돌아 눈앞은 쨍하고 거리 곳곳에서 분사한 물이 오렌지 나무 위로 안개처럼 흩어지고 있었다. 햇살이 살을 찌를 듯 뜨거워도 그늘에 들어서면 금세 시원해지는 게 너무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그때였다. 갑자기 한 사람이 바닥에 주저앉더니 울기 시작했다. 정류장에 있던 사람들과 지나가던 사람들은 당황해서 웅성거렸다. 그야말로 엉엉 소리 내 우는 울음이었기 때문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 여성분이 그 사람에게 다가가 대화를 나누는 듯하더니 잘 달래서 택시를 태워 보냈다. 여기까지가 그날 눈앞에 일어난 일의 전부다. 그런데 그 일이 왜 그렇게 나를 흔들어 놓았을까. 시간이 이렇게나 흐른 지금까지도. 이마에 둘리어 있던 인디언..
2024.11.12 -
헤어졌다.
조승연 작가나 이동진 평론가, 다니엘 린데만과 같은 사람들 무리에 별안간 끼어있고 싶다. 그냥 취향이 그렇다. 염화미소처럼 서로 알아채 마음 깊이 공감하는 대화를 주고받고 싶다. 그들의 흘러넘치는 교양을 곁에서 조금이라도 나눠 갖고 싶다. 배우는 데 열심인 사람은 알게 된 것을 말하고 싶어 한다는 특징이 있으니까, 곁에서 짐짓 모르는 체하고 있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무심하게 들어줘야지. 한날은 책이나 영화에 대해 다양한 각도의 감상을 두루 나누고도 싶다. 그들의 대화 속에 녹아들기 위해 막 허덕허덕여도 너무너무 행복하겠지. 내게 강같은 지적 허영, 달콤한 꿈. 얼마 전 헤어진 사람은 거짓말을 일삼는 사람이었다. 미혼이라고 거짓말하더니 다음엔 이혼했다고 했고, 그 다음엔 아직 이혼 서류도 제출하지 않은 상..
2024.11.10 -
이게 다 호르몬 때문이다.
생리 전후로 늘 컨디션 난조가 따른다. 무거워지는 몸보다 가라앉는 기분이 큰일이다. 우연히 생리 주기 애플리케이션을 알게 돼 생리 시작일과 종료일, 그날의 컨디션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의견 충돌이 유독 잦거나 우울해져 울음이 터지는 날들이 차곡차곡 쌓이면서 재미있는 맞물림을 발견했다. 생리가 얼마 남지 않은 때마다 좌절하고 갑작스러운 화를 주체 못하거나 상처를 주고받는 내가 보였다. PMS가 있다는 걸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데이터를 보고 있자니 충격이 크면서도 오히려 마음이 놓였다. 생리가 시작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우울과 슬픔은 사라지니까. 다스리면 된다.몸과 정신의 대격돌 시기를 자각한 뒤로 최대한 안전한 환경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사람들과의 만남을 줄이고, 즐겁고 재미있는..
2024.05.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