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11. 8. 22:23ㆍ요즘의 녹음
드디어 천황산, 재약산 등반에 성공했다. 올 2월에 뜻밖의 케이블카 안전점검 이슈로 입구에서 허망하게 돌아왔던 적이 있다. 벼르고 벼르다 8개월만에 성공해서 굉장히 뿌듯했던 산행.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 붉은색으로 등산하고 푸른색을 따라 하산하는 코스로, 중간 지점 천황재에서 오른쪽으로 난 길(샘물상회 방면)을 따라 원점회귀하게 된다. 소요 시간은 총 5시간(12시-17시)이 걸렸다. 휴식 시간과 길을 잃은 시간 포함된 시간이고, 일부러 느릿느릿 걸었기 때문에 보통 체력의 소유자라면 산행 시간은 1시간 정도 단축할 수 있다.
막상 도착해보니 줄줄이 차들이 노상주차를 하느라 호박소 방면으로 끝도 없이 이어져있었다. 아니 평일인데 등산객들이 이렇게나 몰린다고? 근데 그럴 수밖에,,, 주차장이 너무 좁다. 그래도 가야지 어떡해.
등산 초반엔 너무 친절한 데크길과 생각보다 따뜻한 날씨에 들떠 사진을 찍을 겨를도 없었다. 데크길이 끝나고 본격적인 산길이 펼쳐지는 중에도 한참을 시야가 트이지 않더니 어느 순간 갑자기 조망이 나타났다. 페스추리처럼 겹겹이 이쁘게도 솟아있다. 거리에 따라 수묵의 농담이 달라지는 것처럼 색이 달라지는 것도 아름답다. 영남알프스를 이루는 산들은 확실히 산세가 다르다. 동글동글 부드럽다기 보다 삐죽빼죽 선이 명확하다. 자그마한 나라에서 경상도, 전라도, 강원도 지역마다 모양새가 다른 것도 신기하고 재미있다.
케이블카에서 내리는 순간 이미 해발고도가 1020m이기 때문에 천황산 정상에 도착해서도 체력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일부 구간을 제외하고는 천황산 정상까지는 능선을 타는 산길이라 체감상 난이도는 중하. 그래서인지 천황산 정상에서는 쉬기 보다 조망을 내려다보기 바빴던 것 같다. 특히 저 밑에 내려다보이는 절벽에서 점심을 드시던 분들(위 사진)이 풍경 속에 녹아들어 있는 모습을 한참 바라봤다. 부러워서 울 뻔.
천황산 정상을 지나 곧바로 재약산으로 향하는 내리막길이 펼쳐지는데 갈수록 풍경을 더욱 가을가을해지고, 사진을 찍으려 여러번 멈춰섰다. 걷다보면 초입에서 만난 분들과 앞거니 뒤서거니 하느라 낯이 익는다. 억새가 가득해서 반짝반짝거리던 날.
천황산을 내려오자마자 바로 재약산으로 가는 길이 시작되는데 계단으로 잘 안내되어 있고 험하지 않아 큰 어려움은 없었다. 근데 이때까지는 몰랐지, 재약산 코스가 그럴 줄은...
뜬금없이 재약산 입구 사진부터 일단 봐보자. 왜냐하면 없어요, 사진이, 너무너무너무 힘들었거든요. 끝없는 계단을 올라 산길을 지나더니 보폭보다 큰 바위들을 타고 올라야 하는 줄은 정말 몰랐거든요... 천황재에서 재약산 정상까지 체감상 난이도 상.
천황산에서 충분히 쉬질 못해서 재약산에서는 꼼짝없이 앉아 숨을 골랐다. 신발도 벗고 다른 분들 사진 찍는 것도 구경하면서 앉아 있으니 좀전에 만났던 분이 오셔서 혼자만 이 좋은 자리에 앉아 있냐고 농담을 건네셨다. 여럿이서 오르면 즐겁고, 혼자서 오르면 뇌 속 청정기가 돌아간다. 이러나 저러나 즐거운 산행.
천황산에서 그치지 않고 재약산까지 등반을 고집한 이유는 순전히 사자평 때문이다. 재약산 지나면 사자평이란 늪지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산 한 가운데 자연적으로 조성된 슾지라니, 어떤 모습일까 궁금했는데 의외로 억새 평야 모습으로 눈앞에 펼쳐진다. 위 사진 속에서 노랗게 펼쳐진 부분이 바로 사자평, 저 너른 풍경이 보고 싶었다.
사자평의 유래 / 사자평의 가치
바람에 흩날리는 억새가 사자의 갈기 같아서
저 곳이 '사자평'이라고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해발 700m에 위치한 사자평 습지는
규모만 58만7000㎡ 크기로
국내 최대 산지습지, 억새 군락지로 꼽힌다.
그렇게 한참을 쉬다가 막상 내려가려니 눈앞이 막막했다. 악으로 오르긴 했는데, 그 길을 다시 내려갈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설상가상으로 내려가던 중에 엉뚱한 길로 빠져 다시 되돌아와야 했고 이 때 체력과 시간을 많이 허비했다. 멘탈도 바사삭. 그래도 중간중간 가을꽃들을 만날 때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사진을 찍었다. 올 여름 한라산에서 봤던 용담이 이곳에서도 보이니 너무 반갑고 이쁘고.
천황산과 재약산 사이에 있는 억새밭과 쉼터의 풍경, 내가 좋아하는 나무 계단길이 끝도 없이 펼쳐진다.
재약산에서 다 내려왔을 때쯤 눈 앞에서 거대한 산 봉우리가 있길래 저기는 어디야 했는데 알고보니 내가 내려온 천황산 ㅋ ㅋㅋ ㅋ 저기를 어떻게 다시 가… 오를 자신이 없어 망설이다가 데크에 앉아 쉬고 있는 분들께 여쭤봤다.
"혹시 이 옆길로 가도 케이블카를 탈 수 있나요?"
-네, 천황산으로 다시 올라가면 돌아가는 거니까 샘물상회쪽으로 가세요.
이름도 너무 이쁘지, 샘물상회. 근데 길은 더 이쁘지. 전날 비가 내려서 그런지 오를 때도 진흙길이 이어졌지만 이쪽 길엔 아예 대놓고 개울이 흘렀다. 등산코스에 대해 전혀 모르고 갔던터라 흡사 선물같은 길이었다. 산길인데 이제 개울과 계곡 물소리를 더한. 평탄평탄한 산길이라 체감상 난이도는 하.
샘물 상회로 가는 동안 만난 분은 딱 한분이었다. 중간에 길을 잃는 바람에 시간을 허비해 케이블카 시간을 맞추지 못하면 어떡하지 하는 마음에 괜히 마음이 조급했다. 하지만 풍경은 너무 아름다워서 또 사진은 찍어야겠고.
다행히 마감 시간인 5시 전에 도착해 여유있게 내려올 수 있었다. 얼음골 케이블는 오를 때는 백호바위, 내려갈 때는 얼음골 유래에 관해 설명해주는 안내 방송이 나오는데 꽤 유익하다.
하산을 마치고 주차해놓은 곳으로 가다 올려다보니 지는 해에 드문드문 단풍들이 너무 눈부셨다. 올 2월에 왔을 땐 눈이 쌓여 있었는데(위 사진) 참 묘한 기분. 늘 그렇지만 산행이 끝나면 다리가 후들거려 갓 태어난 기린처럼 걷게 된다. 그 모습이 퍽 웃기지만 이후로 펼쳐질 근육통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다치지 않고 산행을 마무리할 수 있어서 감사하다.
산을 타다보면 드는 생각 중 하나는 다들 왜 이렇게 산을 찾을까, 하는 것이다. 어찌보면 한발짝 옆이 천길 낭떠러지인데 다들 길을 만들고 타고 심지어 성심으로 오르는 게 늘 재미있다.
다음엔 어디 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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