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12. 26. 20:04ㆍ와유와 사유
사람이 사랑없이 살아갈 수 있나요?
경계선 위에서 위태로운 사람들이 있다. 혹은 경계 밖으로 완전히 밀려 필연적으로 소수인 사람들도 많다. 그들의 공통점은 딱히 뭘 하려 하지 않아도 본능적으로 눈길을 끈다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잔뜩 등장한다. 아우슈비츠에 수용되었다가 살아난 유대인 여성, 노년의 무슬림, 매춘부, 성소수자, 부모에게 버림받은 많은 아이들, 정신병원에서 치료감호 상태로 지내던 살인자까지.
모모는 언제나 자신의 출생을 궁금해하고, 기회가 되면 사랑을 구한다. 바닥에 똥을 싸지르거나 물건을 훔치다가 고약하게 혼나고 나면 자신에게 관심있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꽤나 삐뚤어진 방식이다. 좋으면서 싫어하고, 그리워하다가도 퉁명해서 아이라기에는 이미 방어적이다. 그런 아이는 늘 그렇듯 일찍 철이 든다.
완전히 희거나 검은 것은 없단다
다행인 점은 모모에게는 우정을 나눌 수 있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 어느 나라의 속담처럼 온 마을이 나서진 않았지만 어린 모모를 보살피고, 지혜를 들려주고, 글을 알려주고, 따끔하게 조언하고, 황당한 이야기도 찬찬히 들어준다. 특히 모모가 유일하게 가족으로 선택한 로자 아주머니와 함께 한 모든 시간들이 모모를 입히고 먹이고 길렀다.
살면서 꾸준하게 느끼는 것 중 하나는 사람은 서로 연결될 때 에너지를 얻는다는 사실이다. 나그네의 외투를 벗기는 건 바람이 아니라 태양이었다. 타인과 긍정적으로 연결되는 모든 작용은 일종의 태양같은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사람을 살게하는 것은 결국 사랑이라는 사실이다. 반려자를 향한 마음이 사랑이듯 친구를 아끼는 마음도 사랑이고, 바다 한 가운데 범고래를 엄려하는 마음도 사랑이다. 유효기간이 끝나버린 관계를 깔끔하게 자르고 나아가는 발걸음도 사랑이다.
아니 이 사람 재미있는 사람이었어. 뤼시앵 브륄라르, 포스코 시니발디, 샤탕 보가트, 에밀 아자르. 이 네 개의 이름은 로맹 가리가 살아 생전 사용했던 필명이다. 로맹 가리는 약 20여년 동안 자신이 에밀 아자르라는 사실을 숨겼다. 한 작가에게 두번 수상하지 않기로 유명한 프랑스 문학상, 공쿠르상을 두 번이나 수상하지만 그는 입을 열지 않는다. 몇몇 똑똑한 비평가들이 필체를 비교하거나 작품 속 문장들의 중복을 근거로 많은 의문을 제시할 때도 그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나는 그것들을 무척 즐겼다
그리고 감사한다
그는 에밀 아자르를 자신의 오촌 동생이라고 소개하며 철저히 비밀을 유지하려 노력했고, 그로 인해 문단에서 구설수에 오르는 일을 기꺼이 감수했다. 가까운 가족들도 같은 마음으로 함께 비밀을 지켜줬다. 그가 유서처럼 남긴 작품, <에밀 아자르의 삶과 죽음>이 세상에 출간되고서야 로맹 가리가 곧 에밀 아자르임이 밝혀진다. 그런 수고로움과 불편함을 감수하고서라도 새로운 인격을 가지고 싶었던 이유는 이를테면 이런 것에 있다.
에밀 아자르의 이름으로 발표한 작품들 속에서 비평가들은 숨은 로맹 가리를 찾아내지 못한다. 그 사실이 로맹가리에게 얼마나 큰 통쾌함을 선사했을지 상상이 간다. 하지만 마지막에는 많은 사람들이 짐짓 모른 척 해주고 있었다는 것 역시 깨닫는다. 그러니 감사할 수밖에.
이 책을 읽고 미국 배우 진 시버그와의 일화도 알게 됐다. 로맹 가리는 헐리우드에 진출한 후 배우 진 시버그와 사랑에 빠져 두번째 결혼 생활을 시작한다. 20년간의 외교관으로 일하던 생활을 끝내고 진과 사는 동안 그의 내면은 변화하고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했다고들 한다. 로맹 가리 역시 그 시절은 청춘의 마지막 나날들이었다고 회고한다. 하지만 인종차별 문제에 관심이 많고 인권 운동에 적극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진 시버그는 FBI의 표적이 되어 악의적인 루머와 감시에 시달리다가 자살을 하고 만다. 그로부터 1년도 채 지나지 않아 로맹 가리 역시 같은 선택을 한다.
주인공인 모모는 일찍 철이 들었지만 대부분 딱 그 나이대의 소년이 할 법한 생각과 상상을 한다. 꿈을 많이 꿔야 빨리 자란다는 로자 아주머니의 말을 기억하고 주먹이 큰 사람의 손을 보더니 그의 주먹은 쉴 새 없이 꿈을 꿨나보다, 하고 생각하는 장면. 하밀 할아버지가 들려준 니스의 새들(기쁘면 박수를 치듯 날개짓 하는)을 만나기 위해 무작정 집을 나서는 장면. 중년의 그가 어떻게 그런 아이의 말과 생각을 글에 담을 수 있었을까? 지금의 내가 90대 노인의 어투를 상상해보려하니 도무지 모르겠다. 로맹 가리야말로 진정 철부지, 무지개, 생을 쫓아가는 시계바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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