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11. 26. 23:37ㆍ와유와 사유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보는가는
크게 신경 쓰이지 않았다.
다만 내가 나를
설명할 말들을 찾고 싶었다.
나를 이해할 언어를 갖고 싶었다.
_은유, 글쓰기의 최전선 중
나는 빠순이다. 그 대상은 사람이 아닌 기업, 그것도 영화사다. 미국 뉴욕에 위치한 이 작은 영화사는 10여년 전부터 차츰 세력을 키우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자라서, 내로라하는 작품들을 꽤나 만들어내고 있다. 주관적인 기준으로 선별한 일부 작품들은 대략 이 정도이다.
마이너한 감성으로
인간의 특정 부분을 건드린다
문라이트, 2016
달빛 아래 흑인 소년들은 파랗게 보인다
가장 처음의 기억은 영화 문라이트. 이 영화의 작가와 감독이 알고보니 같은 동네에서 유년 시절을 공유했던 사이라는 걸 뒤늦게 알게 됐다는 이야기를 좋아한다. 샤이론이 기어이 올드카를 몰고 도착한 레스토랑에서 케빈의 얼굴을 살피며 쭈뼛거리던 때 나는 집요하게 샤이론을 살폈다. 이후로 A24는 메이저 영화관에서 잘 볼 수 없어 독립영화관을 찾아야만 하는 영화들을 곧잘 만들었고, 나오는 족족 죄다 취향이었다.
플로리다 프로젝트, 2017
난 어른들이 울기 직전에
어떤 표정을 하는지 알아
여름 필터를 씌운 듯한 영상 속에 순진무구한 아이들이 뛰어노는 곳은 디즈니 랜드 근처 임시숙박시설이다. 일주일치 방세도 내기 힘든 엄마가 주인공 무니와 함께 살아가는 모습은 거의 다큐멘터리 수준으로 실상을 잘 담고 있다. 실제로 2008년 미국 경기침체 이후 디즈니월드 주변에는 주거가 불안정한 이들이 모여사는 모텔이 늘어났다고 한다. 디즈니월드의 화려한 불꽃놀이와 디즈니월드에 들어가지 못하는 소외계층의 현실이 너무 밝게 묘사돼 더욱 마음이 아팠던 영화.
애프터양, 2022
진짜 추억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인서트 천재 코고나다 감독과의 첫 만남. 백인 아빠와 흑인 엄마 사이에 중국인 딸 미, 그리고 그 딸을 위한 안드로이드 양이 한 가족으로 나온다. 릴리슈슈의 오마주도 중간중간 등장해서 찾는 재미가 있다. 영화가 끝나고 엔딩크레딧이 올라갈 때 흐르던 미츠키의 커버곡은 요즘도 즐겨 드는 곡이다.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2022
그 모든 거절과 그모든 실망이
당신을 여기로 이끌었어
다중우주가 재미있기까지 하면 이 영화가 되는구나. 양자경의 액션과 조부 투파키의 괴랄함이 만나면 이런 울음이 터지는구나. 두 사람이 끝내 돌이 되어 독백하는 장면에서 흐르는 적막이 참 좋았던 기억이 난다. 영화 컨택트와는 또 다른 모녀이야기이다. 근데 2022년에 우주에 뭔 일 있었나? 애프터양에 에에올에 애프터썬까지. 영험한 기운이 A24를 휘감은게 분명하다.
클로즈, 2023
상실의 사건을
성장의 계기로 쉽게 소비하지 않는다
_영화평론가 이동진
어제와 다른 너를 견디며 우린 어떻게 견디며 자라난걸까. 둘이서 약속했던 세계가 무너질 때 견디는 방식이 레오와 레미, 두 사람이 서로 달랐다. 마음이 덜 여문 시절에는 모든 감정이 너무 크고, 깊고, 짙다. 마치 감당하지 못하는 뭔가가 가슴 속에서 오르락 내리락해서 겁이 난다. 그 시절을 보는 것만 같아서 내내 마음이 쓰였다.
패스트 라이브즈, 2023
이것도 전생이라면 다음 생에는
서로에게 다른 인연이라는 것이 아닐까
그때 우린 누굴까
순전히 유태오를 향한 팬심과 A24에 대한 충성심으로 관람했던 영화. 결과적으로 좋았다. 영화가 끝난 뒤 아서에게 안겨 우는 노라의 심정을 헤아려봤다. 만약의 갈래가 머릿 속을 헤집는 순간에도 착실히 쌓여가는 현실에 심란했으려나. 해성을 배웅하고서야 비로소 터져나온 눈물은 일종의 안도감일지도 모른다. 영활를 보며 한 때를 나눈 사람들을 추억했다. 다정하고 싶었지만 종종 고약했던 내 모습이 있었다.
존오브인터레스트, 2023
악은 평범하게 존재한다
초여름 굴뚝에선 연기가 오르고, 총 소리에 방 안에서 놀던 아이는 "다음부턴 그러지 말라"고 충고한다. 아름답게 정돈된 화면 속에서 오고가는 말들은 그렇지가 못해서 징글징글했다. 반전효과로 무언가를 구분하는 시도도 흥미로웠다. 장군의 토악질과 박물관 진공청소기가 교차되는 장면도 엄청 강하게 다가왔다. 아마도 미래를 예견했거나, 어쩌면 일말의 양심이었을지도 모르지. 위기 속에서 감자와 사과로 서로를 돕던 사람들과 어쩔 수 없이 견뎌야 했던 사람들이 종전 후에도 끝내 잘 살아남았기를. 영화 속에서나마.
위에서 소개한 대부분의 영화들을 볼 수 있었던 건 경남 유일의 독립영화관 에스빠스리좀의 힘이 크다. 이 영화관을 몰랐을 때는 부산국도영화관까지 가서 보고 돌아오곤 했는데, 정말 내겐 귀하디 귀한 공간. 오래오래 머물러 주세요.
끝으로 곧 개봉을 앞둔, 기다리고 있는 영화 두 편을 소개하고 마무리하려고 한다. 퀴어는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의 차기작이라서, 베이비걸은 니콜 키드먼때문에 기다리는 중이다.
감독에게 전적으로 그 영화를 맡겨 간섭하지 않는 것이 이 영화사의 강점이다. 성장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아 길고 길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A24를 열렬히 찬양하는 이 지독한 러브레터ㅋㅋㅋ ㅋ. 오늘의 공장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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