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책 / 즐거운 일기 / 최승자

2024. 11. 19. 18:50와유와 사유

728x90
반응형

 


이상하지,

살아있다는 건,

참 아슬아슬하게 아름다운 일이란다.

_20년 후에, 지芝에게

 
 

실컷 자고 일어나 가방을 챙겨 나왔다. 지난밤 느즈막이 먹은 음식이 겨우 소화된 기분이라 아침은 건너뛰었다. 맑지만 구름이 많은 날씨가 꼭 시인을 닮았다. 지독한 우울과 거친 단어들에 이 사람은 어떤 사람인지, 대체 어떤 삶을 살아온 건지 궁금했지만 책을 덮으면서 그냥 내 궁금증도 함께 덮어 두자고 결심했다.

 
 
 

그러면 나 일어나

네게 가르쳐 줄게

어째서 사교의 절차에선 허무의 냄새가 나는지,

어째서 문명의 사원 안엔 어두운 피의 회랑이 굽이치고 있는지

_누군지 모를 너를 위하여

 
 
 

언젠가 후배가 그랬다. 저는 이 직업이 좋아요. 한없이 사랑해도 되잖아요. 그저 열정 많은 사람이구나, 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그 말이 지난 계절부터 계속 내 머릿속을 맴돈다. 생각해보니 누군가를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한다는 건 참 축복인 일이었다. 의심없이 불안없이 마음 놓고 사랑해도 되는 대상이 있다는 건 정말 일생에 한 명뿐이라 해도 너무나 행복한 일이다. 

 
 
 

폰 가갸씨는 오늘도 출입문에 열리고, 의자를 앉히고, 점심이 그를 먹어 치우도록 둔다. 월급봉투가 그를 쑤셔 넣고 잠이 그를 갉아먹는다. 폰 가갸씨와 필경사 바틀비씨가 만나면 얼마나 재미있을까. 바틀비씨는 그러지 않는 편을 선택할 거고, 폰 가갸씨는 그러는 편으로 내버려두겠지. 재밌겠다고 그러니까 누가 좀 써 줘,

 
 
 

일찍이 나는 흘러가는 것은 마찬가지라고 생각했었다

다른 사람들이 길이로 넓이로 흘러가는 동안

나는 깊이로 흘러가는 것뿐이라고.

_산산散散하게 선仙에게 중

 
 
 

오늘 집 밖으로 나선 건 청소할 때마다 자꾸만 못본 채했던 필름들이 드디어 눈에 거슬리고야 말아서.. 몇년 째 종이가방에 잡동사니들과 함께 담겨져 있던 것을 끄집어 냈다. 그런 물건들이 한둘이 아니다.

 
 
 

공단칼라

경남 창원시 성산구 원이대로 587 정우상가 1층 (용호동 73-62)

place.map.kakao.com

필름을 현상해 주는 곳이라고 검색해서 찾아간 곳에서는 빠르게 일련의 과정을 설명했다. 단계는 4단계, 사진의 크기를 선택해야 한다. 아무것도 찍혀있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요? 그럼 다시 돈을 돌려드립니다. 뭐가 뭔지 어질어질하면서도 원하는 옵션을 고른 후 맡겼다. 사진 속 2019년이라는 숫자가 너무 당혹스럽네. 이거 되려나?

 
 
 

필름을 맡기고 돌아오면서 담은 롯데아파트 풍경. 단지 안에 들어가 구경하기에는 망설여지는 낮은 아파트다. 지날 때마다 터줏대감처럼 그곳에 있다. 단지 속 수령이 오래된 커다란 나무들은 색바랜 건물과 잘 어우러 이물감이 없다. 구축아파트는 그 자체로 이미 하나의 생태계라는 말이 맞다. 신축 아파트에서는 볼 수 없는 특유의 양식이 좋다. 재건축되기 전에 많이많이 봐 둬야지.

 
 
 

  그렇습니다. 나보다 더 무거운

더 괴로운 이파리 위에서라도

어디서나 흔들리는 피곤한 잎사귀 위에서라도

나는 하룻밤 단잠을 자고

_하산下山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