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11. 14. 18:11ㆍ와유와 사유
오늘은 수능일이라 어디 나가지 않고 조신하게 집에서 홈카페를 열었다. 지난달 구입한 책과 차의 맛이 참 좋다. 수능 한파는 이제 옛날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라떼는 새벽에 추워서 발이 얼고 그랬어... 그래도 공기는 꽤 차가워 얼른 물을 올려 차를 우렸다. 따뜻한 것이 좋아지는 계절, 마음껏 가까워도 괜찮은 계절이다.
잊어버리고 살다가도 둥둥 떠오르는 글귀가 있다. 그럴 때면 종이를 꺼내 새기듯이 필사한다. 김수영 시인의 <봄밤>이 그 중 하나인데 그의 시가 모두 궁금하던 차에 지난 달 서점에 들렀다. 한강 작가의 노벨상 수상을 축하다는 커다란 플래카드가 입구에도 매장 안에도 이어져 있었다. 매대에서는 찾을 수가 없어 직원의 도움을 받았다. 내부 창고에서 꺼내다 주는 것을 받으니 꽤 묵직하다.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강물위에 떨어진 불빛처럼 혁혁한 업적을 바라지 말라
너의 꿈이 달의 행로와 비슷한 회전을 하더라도
너는 결코 서둘지 말라
이 시를 처음 접한 건 이다혜 영화 기자의 SNS 창이었다. 본인이 종종 떠올리곤 한다며 그가 공유한 것. 그때의 나는 마음이 엉망진창이 난 줄도 모르고 냅다 살아가던 허수아비였다. 진행 중인 일이 말도 안되게 엉키고 소통도 원만하지 않다고 느껴 마음만 급하고 욕심만 앞서던 날들. 한글자씩 읽어 내려가니 이내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던 기억이다. 이렇게 좋은 것을 나누다, 나누다 보면 저 멀리 누군가에게 가닿는다. 그러니 나도 이렇게 서둘지 않고 좋은 것을 찬찬히 기록하는 것이다.
책을 읽어 가다보면 시인이 여편네, 아내, 처라고 서술하는 사람이 나온다. 바로 시인의 아내 김현경. 이번에 책을 다 읽고 궁금증이 일어 검색 해보다가 두 사람의 이야기를 알게 됐다. 시인이 시를 완성하고 나면 김현경 여사는 두 벌을 정서했는데 한 벌은 청탁을 해온 곳으로 보내고 한 벌은 보관했다고 한다. <너를 잃고>는 시인이 오래 알고 지내던 친한 친구(이종구)의 집에 아내를 두고 온 후 지은 시다.
전쟁에서 살아남아 죽을 고비를 여러번 넘긴 끝에 시인은 아내를 찾아 온다. 자신에게 김현경을 소개시켜준 절친의 집에서 함께 동거하고 있는 모습을 보며 억장이 무너졌을 거다. 사실은 김수영이 전쟁 포로로 수용되어 있을 동안 이종구가 친정으로 보내준 생활비에 대한 은혜를 나름 갚고 있던 거였는데. 이종구의 끼니와 빨래를 해결해주며 . 얼마후 둘은 아무일 없었다는 듯이 재회하고 다시 부부의 삶을 이어간다. 이후 김수영은 그 일에 관한 일을 한번도 입에 올린 적이 없다고 한다. 하지만 아무렇지 않은 건 아니었던 모양이다.
이 시는 보자마자 눈에 익었다. 김수영 시인이 아내를 때리고 스스로 고백한 시이다. 인터뷰를 찾아보니 김현경 여사는 그때를 이렇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 조선일보 뒤쪽에 영화관이 있었어. 영화 길(La Strade)을 봤는데 아주 정말 멋진 명작이야. 그걸 보고 한참 감동이 꽉 차 있는데, 길에서 갑자기 날 때려눕히데. 거기서 쓰러지진 않았지만 사람들이 웅성웅성 왜 저렇게 두들겨 패나 하고 모여들고... 다섯 살짜리 아들은 울고, 나도 놀랐지."
"보통은 영화를 보고 감동을 하면 방에 누워서 밤새도록 이런 얘기 저런 얘기를 하거든. 그날은 집에 와서 서재로 들어가더라고. 나는 왜 때렸느냐, 왜 그랬느냐, 뭐 한 번도 물어보지 않았어. 자기가 나한테 뭐든 순수한 것이 좀 미웠던 모양이지. 그것도 김 시인이니까 할 수 있는 태도야. 술에 취해서 이종구 얘기를 할 법도 한데 나한테 한 번도 그 소리 안 하고 살았으니까. 대단한 사람이야."
역시 사랑은 두 사람만이 아는 것이다. 폭력을 옹호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타인은 감히 헤아리지 못하는 것들이 많다. 그래서 김현경 여사의 저 말이 더 묵직하게 와 닿는다.
책을 덮었을 때 머릿 속에 폭풍을 일으키는 작품들을 좋아한다. 꼭 책이 아니더라도 영화, 드라마, 공연 무엇이 되었든 접한 이후 나의 세계가 확장하는 작품들이 좋은 작품이라 생각한다. 이번 전집을 통해 알게 된 시, 필사할 구절들이 많아져서 마음이 넉넉하다. 포스트잇으로 표시해 뒀다가 다시 펼쳤을 때 어떤 구절 때문에 표시를 해 둔건지 기억이 안 날때가 있다. 그러다 또 시간이 지나면 다시 같은 곳에서 분명 감동받을 걸 아니까 무조건 표시해 두는 편.
오늘 책과 함께 한 차는 사랑의 온도라는 이름의 허브 블렌딩 차이다. 올여름 팜파스 사냥하러 김해에 갔다가 들른 곳인데, 카페인이 없어서 늦은 오후에 마셔도 아무런 지장이 없다. 사진 속 색감이 정말 여름여름하구나.
아니 근데 난 조신하지 못한 가봐... 이 날씨에 집에만 있기 아쉬워서 근처 공원을 산책했다. 여기 따뜻한 남쪽나라는 이제 단풍이 한창이다. 요즘 가장 이쁜 것은 은행나무와 미국풍나무. 나무 밑에서 올려다보면 이파리들이 정말 반짝반짝거린다. 나간 김에 마트에 들렀다가 마침 해감을 마친 바지락이 세일 중이라 한 팩을 샀다. 함께 사 온 샤인머스캣은 계절이 뒤늦게 달다. 내일은 파스타랑 리조또 해먹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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