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11. 15. 18:13ㆍ와유와 사유
교과서에서 보던 국보와 보물들을 눈앞에 볼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만족스러운 관람이었다. 마치 인왕산을 처음 보고 교과서에서 보던 인왕제색도가 떠올라 묘했던 때와 같은 기분이었다. 야관람이벤트에 관한 내용은 가장 아래에서 볼 수 있다. 원체 느린 사람인데다 관람 인원도 많아서 거의 5시간이 넘도록 머무르며 찬찬히 관람했다. (야간관람이벤트에 대한 내용은 맨 아래에 있어요)
2층에서 매표를 마치면 정해진 시간대별로 아래 전시실로 들여보낸다. 신분증을 맡기면 오디오 가이드를 무료로 대여할 수 있으니, 수많은 인파 속에서도 각 작품에 대한 설명을 놓치고 싶지 않은 사람이라면 꼭 대여해서 전시를 즐기는 것을 추천한다.
모든 전시실을 순서대로 관람할 필요는 없다. 각 전시실마다 테마가 다르기 때문에 시대의 흐름에 구애를 받지도 않는다. 전시실 1 입구에서 아래쪽으로 보이는 계단을 이용하면 전시실 4로 빠르게 이동할 수 있다. 단, 전시를 모두 관람했다면 전시실 4에서 전시실 5로 향하는 길목에 위치한 수공간도 너무 아름답기 때문에 꼭 놓치지 말고 이용하시길.
실제 국보와 보물은 전시실 1~4 로 끝나지만 전시실 5에서는 전시된 국보와 보물을 활용해 하나의 이야기를 구성한 미디어 전시 <흐름>도 상영하고 있다. 편하게 기대거나 누워 파노라마 화면에 펼쳐지는 이야기를 따라가는 것도 전시의 끝을 장식하는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인파에 시달려 지친 몸을 저곳에서 달래고 나왔다.
무려 818cm 길이의 작품을 따라 찬찬히 걷는 동안 마음이 참 따뜻해졌던 작품. 촉잔도권은 중국 쓰촨성으로 향하는 매우 험난한 길인 '촉도'의 여정을 다루고 있다. 그림의 오른쪽에서 시작한 이 길은 풍요로운 도시 풍경으로 끝이 난다. 중간에는 바위산과 깊은 계곡, 끊어진 길과 나무다리가 있어 가야 하는 길이 쉽지 않다는 걸 보여준다. 심사정은 두 조카의 요청으로 이 그림을 그렸는데, 그림을 통해 인생의 험난함을 보여주고자 했던 것이다. 그림의 끝에 풍요로운 도시를 그린 것은 험한 길 끝에 두 조카의 성공을 바라는 마음을 담은 것이다. 이 글을 읽는 분들도 그게 무엇이든 끝내 이루시기를.
백곡 김득신은 뛰어난 풍속도를 많이 남겨 김홍도, 신윤복과 함께 조선시대 3대 풍속화가로 불린다. 긍재전신첩은 풍속화 8점을 엮어 만든 김득신의 대표 작품으로 위 세 그림은 그 중 일부이다. 소나무 아래에서 장기를 두는 승려들의 표정이 저마다 달라 승패를 가늠할 수 있을 것만 같아 재미있다. 짧은 순간 나타나는 사람의 동작과 표정을 정말 잘 잡아 묘사했다는 생각이 든다.
가장 많은 인파가 몰렸던 신윤복의 작품들. 이곳에서만 족히 30분을 기다린 듯하다. 혜원 신윤복은 조선시대 사람들의 멋과 흥을 그림으로 남긴 특별한 화가다. 김홍도가 농민의 생활을 주로 그렸다면 신윤복은 한양의 도시 풍경이나 남녀 간의 사랑 등을 그렸다고 한다. 혜원전신첩은 조선시대 한양에 살던 사람들의 생활을 담은 30점을 엮어 만든 작품으로, 자신과 같은 중인들에 대한 애정이나 인간의 본모습이 솔직하게 드러나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전시실 2에 단독으로 고고하게 걸려있던 미인도. 보기좋게 차려입은 여성은 갸름한 얼굴에 그윽한 눈으로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다. 공중에 둥둥 떠있는 저 여성의 시선을 따라가다보면 사람이 많다... 역시나 이곳도 많은 인파가 몰렸었다. 신윤복이 유난히 국민들에게 사랑받는 이유가 뭔지 곰곰히 생각해보게 한다.
굴하지 않고 미인도 속 여성의 맑고 은은한 한복의 색과 태도를 눈에 잔뜩 담았다. 오디오 가이드에서 살짝 들린 버선코와 손가락의 움직임에서 생동감이 느껴진다기에 조용히 엄지발가락을 꼼지락거려 보기도 했다.
이것 진품이에요? 진짜에요? 뭔가 보고도 믿을 수가 없어서 직원분께 물었다. 500여년 전 만들어진 작품이 눈앞에 있다는 게 실감이 안 나잖아... 훈민정음 해례본은 훈민정음의 원리와 운용법 등을 설명한 한문 해설서로 훈민정은의 원본에 해당한다. 크게 본문인 <예의>와 해설서인 <해례>로 구성되어 있는데 예의는 세종이 직접 만들었으며 해례는 집현전의 학자들이 만들었다. 정인지, 신숙주, 성삼문, 박팽년, 최향, 강희안, 이개, 이선로 8명이 그에 해당한다.
해례본보다 더욱 마음에 와 닿았던 작품. 대팽고회는 김정희가 세상을 떠난 1856년에 유치욱에게 주기 위해 쓴 글이다. 금박이 뿌려진 고급스러운 종이(냉금지)에 써 내려간 글씨는 종이가 주는 느낌과 다르게 힘차고 거칠다. 두부, 오이처럼 흔한 반찬이 최고의 음식이고, 남편과 아내, 자식과 손주들이 모인 자리가 최고의 모임이라는 내용을 담은 글이다. 추사 김정희는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두 번이나 유배를 당한 경험이 있다. 생의 마지막 해에 이른 김정희가 대팽고회를 통해 남긴 가르침은 어쩌면 일상에서의 평온한 즐거움이 최고라는 사실을 일찍이 깨달았기 때문이 아닐까?
저 작품앞에서 나처럼 뱅글뱅글 돌며 동자를 찾는 사람이 많았을 것 같다. 포도송이가 달린 덩굴 사이에서 어린아이가 뛰노는 모습이 그려진 청자매병. 유업에서 재배되던 포도는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에 들어왔다고 한다. 열매가 많이 열려서 아이를 많이 낳는 다산을 상징하고, 여기저기 뻗어나가는 덩굴은 번영을 바라는 마음을 담는다. 포도 덩굴 사이에 숨은 동자 2명을 찾아보는 것도 관람의 재미. 전시실에 상주하는 직원분 찬스를 사용하면 즐겁다.
아침도 못 먹고 들어가 배는 고프고 기력을 쇠하였지만 작품들이 너무너무 재미있어서 정신없이 관란했던 하루,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바로 옆 핸즈커피에서 커피를 수혈했다. 한참을 앉아있다가 겨우 정신을 차리고 돌아왔다. 마음과는 다르게 날이 갈수록 체력이슈가 나를 괴롭히는구나. 젊어서 놀자.
대구간송미술관 야간관람이벤트는 N차 관람을 인증하는 이벤트이다. 오늘부터 응모시작이니 체력 이슈 없는 건강한 분들, 마침 시간이 되는 분들은 많이많이 응모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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