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11. 12. 19:21ㆍ랭보의 낭보
2016년 여름, 세비야에서 말라가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던 중이었다. 기온은 섭씨 42도를 웃돌아 눈앞은 쨍하고 거리 곳곳에서 분사한 물이 오렌지 나무 위로 안개처럼 흩어지고 있었다. 햇살이 살을 찌를 듯 뜨거워도 그늘에 들어서면 금세 시원해지는 게 너무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그때였다. 갑자기 한 사람이 바닥에 주저앉더니 울기 시작했다. 정류장에 있던 사람들과 지나가던 사람들은 당황해서 웅성거렸다. 그야말로 엉엉 소리 내 우는 울음이었기 때문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 여성분이 그 사람에게 다가가 대화를 나누는 듯하더니 잘 달래서 택시를 태워 보냈다. 여기까지가 그날 눈앞에 일어난 일의 전부다.
그런데 그 일이 왜 그렇게 나를 흔들어 놓았을까. 시간이 이렇게나 흐른 지금까지도.
이마에 둘리어 있던 인디언식 머리띠, 자기 몸집보다 커다란 기타 케이스, 이야기를 나누던 옆모습과 달래주던 이의 하얀 머리칼, 눈물에 절어 빨개진 코와 눈가가 꽤 강렬했나 보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지만 그 짧은 시간 동안 내가 최선을 다해 온갖 생각을 했다는 점도 재미있다. 애인이랑 헤어졌나? 기다리던 공연이 취소됐을까? 오디션 탈락? 소매치기? 그렇다고 비행기를 놓쳤다기에는 너무 투명하고 커다란 감정이었다. 아이처럼 잔뜩 얼굴이 구겨진 채로 우는 모습을 보면서도 바보 같다거나 흉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주변 어떤 사람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럴 수 없는 순간이었다.
말라가로 가는 버스 안에서 나는 계속 그 사람을 떠올렸다. 분명 자신의 마음이 말하는 소리에 언제나 집중하는 사람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사람의 시선에는 아랑곳하지 않는 한 사람이 감정을 불꽃처럼 폭발시키는 장면을 바라보며 묘한 해방감을 느낀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부러웠다. 나는 늘 풍선처럼 조용히 부풀어있기만 할 뿐, 흘러보내야 할 감정조차 내보내지를 못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일까?
감정에 솔직한 사람에게는 늘 속수무책으로 마음을 빼앗기고 만다. 설탕공예품처럼 투명한 주제에 이미 단단하게 막이 입혀진 나로서는 그런 사람들이 사랑스럽고 또 사랑스럽다. 그들의 강건함과 담백함을 동경하고 응원하며 지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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