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11. 23. 22:28ㆍ요즘의 녹음
빌려 온 고양이 같이 버스에 실려 가
신나게 걷고 온 후기
8:05 출발
남성주휴게소-추풍령휴게소
17:50 도착
11:15 트레킹 시작
14:30 트레킹 끝
MBC경남 여성테마기행은 매달 여행지를 선정해 단체로 여행을 가는 경남 MBC의 문화행사다. 경남에 사는 도민이라면, 라디오를 즐겨듣는 애청자라면 귀에 너무너무 익숙한 행사. 그날도 라디오에서 여느 때처럼 흘러나오는 광고였다. 이번엔 어쩐 일로 가보고 싶어서 난생처음으로 신청했다. 도저어언!
카톡에서 창원명신관광을 친추하고 접수를 하면 성명, 생년월일, 연락처, 탑승지를 선택하라는 메시지가 온다. 이후 안내받은 계좌번호로 입금하면 끝! 10분 내외로 모든 절차가 빠르게 진행돼서 편리했다.
11월 여행지는 충북 영동에 있는 월류봉 둘레길과 반야사. 월류봉은 익히 들어 알고 있는 곳이었는데 너무 멀어 선뜻 가기엔 엄두가 나지 않는 곳이었다. 늘 지나치다가 이번에 처음으로 신청했던 이유도 뭐냐면. 첫째, 자차보다 교통편을 이용해 다녀오면 훨씬 덜 힘드니까. 둘째, 늘 가던 곳 말고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곳에서 신나게 걷고 싶어서.
아침 8시 출발이라 7시 40분에 도착했더니 이미 버스는 가득가득. 다들 정말 부지런하시다. 달걀 노른자같은 해가 엄청 크고 노랗게 떠 있던 아침. 안내받은 버스 번호가 맞는지 확인하고 탑승했다. 좌석은 원하는 곳에 앉으면 된다. 버스마다 대장님이 있는데, 버스를 타면 종이를 들고서 탑승 인원을 일일이 확인한다.
버스에 오르니 다들 친구끼리, 가족끼리 모여 앉아 있었다. 안내받은 버스 번호와 다른 버스를 탄 분들이 있어서 작은 실랑이가 있었지만, 소동은 금방 지나갔다. 나는 빌려 온 고양이같이 자리에 앉아 이 모든 광경을 눈에 담았다. 혼자 속으로 신기해, 신기해 백번 외침.
첫 번째 휴게소인 남성주 휴게소를 자느라 놓치는 바람에 두 번째 휴게소에 내려 조금 걷고 스트레칭을 했다. 추풍령 휴게소는 이번이 처음이다. 뒤편으로 작은 산책코스와 벤치들이 있는데 저기 여름에 오면 예쁜 유럽 수국이 한가득이겠다.
너무 귀여운 분홍 버스 다섯 대 쪼로록ㅋㅋ ㅋ 약간 히어로물 시리즈가 생각나는 색감이다. 혹은 트랜스포머. 저멀리서도 보여서 얼른 찍었다.
참가자들에게 주는 손수건과 백설기, 그리고 사진에는 없지만 500mL 생수도 한 병 준다. 아맞다 콜핑과 함께하는 MBC여성테마기행이었지. 검은콩 완두콩 박힌 백설기도 너무 오랜만이라 옴뇸뇸뇸 먹으며 버스 밖을 구경했다.
달이 머물다 갈 만하구나야
출발한 지 3시간 만에 드디어 도착한 월류봉. 날씨도 날씨인데 풍경이 너무 말도 안 되게 아름다웠다. 굽이굽이 흐르는 하천 가운데 5개의 봉우리가 버티고 있다. 해가 떠 있는 곳부터 시계 방향으로 1봉부터 5봉까지.
참가자들 모두 안내에 따라 가볍게 준비운동을 마치고 포토 타임을 가졌다. 원점회귀 코스가 아닌 직선 코스라서 월류봉으로 다시 오지 않는다. 많이 많이 눈에 담아야지.
오늘 걸을 둘레길은 총 세 코스로 1코스 여울소리길, 2코스 산새소리길, 3코스 풍경소리길로 이루어져 있다. 약 8.4km 정도의 길이로 4시간이 주어졌다.
트레킹을 시작합니다. 아니 근데 나는 이런 풍경을 본 적이 없어. 이렇게 많은 인원과 함께 줄지어 같은 목적지를 향해 걸어본 적이 없다고. 뭐든 처음이면 다 즐겁고 재미있구나.
여울소리길 입구 모습. 초반에는 평탄하고 친절한 데크길이 이어진다. 나지막한 산길이 반복하며 오르락 내리락하지만 어렵지는 않은 코스다. 휠체어로 가기엔 힘든 경사. 1코스 여울소리길. 총길이 2.7km.
중간중간 포토존이 많아서 글귀를 읽는 재미도 있다. 데크길 오른쪽으로 흐르는 하천은 이끼가 많아서 거의 초록으로 뒤덮여있었다. 1코스 끝이자 2코스 시작 지점인 완정교가 보일 때까지 걸으면 된다.
완정교가 보일 무렵 간이 화장실이 하나 나온다. (이후 3코스가 끝날 때까지는 화장실이 없다) 순서를 기다리는 사람들을 지나 완정교를 건너면 2코스가 시작된다. 이 코스는 무장애 길로 휠체어도 얼마든지 갈 수 있다. 2코스 산새소리길. 총길이 3.2km.
개천 옆 마을에 감나무에는 빨간 감이 주렁주렁 남아있었다. 찬 서리 맞고 홍시가 되면 맛있는 까치밥이 되겠지. 2코스에 들어서고 나서야 사람들은 저마다 제 속도를 찾아 걷기에 집중한다.
눈앞에 길이 있으면 가보는 편이다. 고등학교 때 하루는 친구가 나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만약에 길을 가다가 사람들이 모여 웅성거리고 있잖아? 넌 그곳에 가서 무슨 일인지 알아보는 사람이야. 난 모여있나보다, 하고 그냥 지나갈 사람이고." 꽤 재미있는 캐릭터 해석이라고 생각했다. 눈앞에 길이 있으면 오히려 마음이 평안해지는 사람. 맞아, 나는 그래.
반짝반짝 물비늘
2코스 중간 지점에서 점심을 먹기로 했다. 테이블이 따로 있는 건 아니고 옹기종기 모여앉아 식사를 한다. 캠핑 의자 챙겨온 분들에게서 느껴지는 짬. 사람들이 멈춰서 자리를 편 곳에 저렇게 예쁜 물비늘이 있었다. 밥을 먹다 말고 카메라로 담은 반짝반짝.
짜잔 내 귀여운 도시락을 보세요. 내 사랑 샤머와 방토, 아침 일찍 일어나 만든 버섯들깨탕에 삼김이 내 점심이다. 옆자리 어머니 두 분이 유부초밥이며 김밥을 먹으라고 권해주셔서 감사하게 하나 받았다. 덕분에 삼김은 다시 배낭 속으로.
이렇게 생긴 표지판을 지나면 백화마을이 나온다. 아기자기한 전원주택들과 작은 카페들이 모여있는 마을. 걷다가 철쭉을 봤는데 너무 놀라서 다시 돌아가 봤다. 철쭉 맞는데? 지난달 10월엔 때늦은 여름 수국이 보이더니, 11월이 다 지나가는 시점에 철쭉이라니. 얘는 때가 늦은 걸까, 이른 걸까 생각다가 재작년 봤던 11월의 개나리가 떠올랐다. 놀랄 일도 아니네. 근데 지구야, 니 개안나?
이 모양의 표지판이 보이면 3코스가 시작된다. 대부분 흙이나 돌길이고 다듬어지지 않아서 거칠었다. 3코스 풍경을 보며, 이곳은 봄에 오면 정말 아름답겠다고 생각했다. 3코스 풍경소리길. 총길이 2.5km.
3코스에만 징검다리가 2번 나오는데 그 중 첫 번째 징검다리. 아참, 3코스 걷다가 또 모르는 분과 대화를 나누었다. 앞서 걷던 분 외투가 너무 예뻐서, 실례를 무릅쓰고 여쭤본건데ㅋㅋㅋ ㅋ 가로수길 어딘가에 위치한 편집샵인 듯했다. 너무 기쁘게, 흔쾌히 대답해 주셔서 물어보길 너무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감사했어요.
3코스 흙길이 끝나고 도로로 올라서면서 반야사로 가는 길이 시작된다. 이곳에서 버스로 돌아갈 사람은 가고, 반야사까지 갈 사람은 이어 걷기로 했다. 15시 20분까지 버스에 도착하면 된다는 안내에 나는 고민도 없이 반야사로 계속 걸었다.
동굴이 있는 반야사인 줄 알았더니 아니네. 거긴 논산 반야사구나. 여튼 이 절에도 굉장히 유명한 호랑이가 있다고 해서 열심히 찍어봤는데 호랑이가 어디에 있다는 걸까. 뉴스 자료와 비교해 보니 배롱나무 피는 여름에 와야 선명하겠네 저거. 아참 저 배롱나무 500년 된 나무라서 엄청 유명 인사.
반야사에 버스로 돌아가는 길 본 풍경. 이번 트레킹을 하는 동안 깨달았다. 난 쉴 줄을 모른다. 발바닥이 아리고 다리가 저린데도 힘에 부칠 때까지 몰아붙이고, 지쳐 나가떨어질 때쯤 앉아서 쉰다. 이러려고 내가 산에 가고, 걷는구나. 내가 몰랐던 내 모습들을 깨달으려고.
오랜만에 깊고 단 잠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는 정신없이 졸았다. 머리를 꾸벅이고, 종종 입도 뻐끔거리면서. 다녀와 보니 여성 테마기행은 일종의 안내산악회 같은 개념이었다. 다녀온 소감은 우선 교통비와 체력 소모를 감안하면 합리적인 가격이다. 만일 원하는 여행지가 나오면 다시 신청할 의향은 충분하다. 다만 나중에 복직했을 때 이날처럼 평일 프로그램은 신청할 수 없기 때문에 그 점이 조금 아쉽다. 아무튼 이날, 빌려 온 고양이는 집에 가서 기절하듯 잠이 들었다.
다음엔 어디 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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